[뉴스] ‘일하고 싶은 은퇴자’ 年 70만명 쏟아지는데… 자리가 없다 (2021.03.26) | 조선일보
고학력 베이비붐 세대 어르신들 “좋은 일자리를 달라”
국내 금융회사와 중소기업에서 30여년간 일하다 3년 전 은퇴한 팽진선(66)씨는 지난 2일부터 새 직장에 출근을 시작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시니어 경영 컨설턴트’란 이름이다. 금융권 경력을 살려 기업에 고령자 채용을 장려하고 경영 조언을 하는 역할이다. 팽씨는 “집에서 ‘삼식이(집에서 세끼를 먹는 사람)’로 지내며 자존감이 추락하고 활력을 찾기 힘들었다”며 “일자리를 통해 자아실현 기회를 주는 게 최고의 복지”라고 말했다.
인천 남동구 평생학습관에는 2년 전 ‘장난감 수리 센터’가 생겼다. 아이들 장난감을 고쳐 새로 쓸 수 있게 해주는 곳이다. 작년에만 2082개 장난감을 받아 2019개를 고쳐 돌려주면서 맘카페 등에선 ‘신의 손’이라고 소문이 났다. 이 센터를 운영하는 기술자 10명은 모두 65세 이상 어르신들. 항공과학고 교장을 지낸 최병남(72)씨가 센터장을 맡고 전직 기업 임원과 고위 공무원, 항공회사 은퇴자 등이 일한다. 월 60시간을 일하고 월급 71만원을 받는 ‘박봉'이지만 보람은 남다르다. 40년간 해양경찰로 일하다가 이곳에 새 둥지를 튼 우종하(67)씨는 “은퇴 후 무기력하게 지내다 이곳에서 아이들을 위해 일하면서 보수를 받으니 기력이 솟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베이비부머' 첫 세대인 1955년생이 처음 노인(65세 이상) 범주에 들어가면서 우리나라 고령화 속도가 가속화할 전망이다. 베이비부머 마지막 세대인 1963년생이 65세가 되는 2028년까지 매년 60만~70만명씩 노인 인구가 늘어난다. OECD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970~2018년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율 증가 속도가 OECD 회원국 중 가장 빠르며, 2026년에는 초고령사회(고령 인구 20% 이상) 진입이 유력하다.
문제는 이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팽씨나 장난감 수리 센터 같은 경우는 보기 드문 성공 사례다. 팽씨처럼 시니어 컨설턴트로 취직한 구동현(64)씨는 “60대가 새로 취직할 수 있는 곳이 전무하다시피 해 일자리를 구하기까지 많은 곳의 문을 두드렸다”며 “또래 중엔 일자리를 찾지 못해 무기력하게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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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률 높지만 대부분 단기 일자리
OECD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우리나라 65세 이상 고용률은 32.9%로, OECD 회원국 중 아이슬란드(34.8%) 다음으로 높다. 수치 자체는 나쁘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 그 안을 들여다보면 상당 부분이 단기 일자리에 몰려 있다는 게 함정이다.
정부가 매년 수십만개 노인 일자리를 생산하고 있지만 생계가 어려운 노인들에게 우선 제공하는 ‘공공시설 봉사’ ‘교통 지도’ 같은 월 소득 27만원 수준 ‘단기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올해 정부가 제공하는 80만개 일자리 중에 59만개가 이러한 ‘공익 활동’형 일자리에 해당한다.
반면 ‘장난감 수리 센터 근로자’나 ‘고령자 금융 업무 도우미' ‘고령자 디지털 교육자' 등 노인 경력을 활용할 수 있는 ‘사회 서비스’형 일자리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2019년 도입, 첫해 2만개에서 작년 3만7000개, 올해 4만5000개까지 늘었지만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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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老 인력 시너지 내도록 해야
노인들 대부분이 은퇴 후 괜찮은 일자리를 못 찾고 방황하다 보니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고 우울감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지난 2019년 서울시가 서울시 노인 3000여 명을 조사한 결과 13.7%가 우울 증상을 보였다는 결과도 있다. 2018년 기준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중위소득 50% 미만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43.4%로, OECD 평균(14.8%)의 약 3배다.
전문가들은 노인들 특성에 맞게 근무 시간을 신축적으로 운용하는 일자리를 다양하게 고안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 담당자는 “베이비부머들이 가진 풍부한 경력을 활용할 수 있는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고령화로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고 있어 노인 인력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노인 일자리가 청년 일자리를 대체한다기보단 서로 시너지를 내는 측면이 크다”며 “기업 컨설팅이나 산업 현장에서의 교육 등 노인에게 맡길 수 있는 영역을 발굴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민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