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외교관 그만둔 것 후회?… 설레는 아침 맞는 지금이 좋아” (2021.06.13) |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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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외교관 그만둔 것 후회?… 설레는 아침 맞는 지금이 좋아” (2021.06.13) | 세계일보

지역혁신경제연대 0 2420

‘우동명가 기리야마 본진’ 신상목 대표

17년간의 외교관 접고 창업
파키스탄 주재 대사관 근무시절
10분 차로 폭탄테러 면한 뒤 결심
‘죽기 전 하고 싶은 일 하자’ 도전
가족들 반대 딛고 9년 전 문 열어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음식은 그냥 ‘한끼’ 아닌 삶의 활력
맛을 위해 번거로워도 원칙 고집
‘이 집 정말 맛있지’ 소리에 기운 나
고용 창출에 일조한단 생각에 뿌듯

자영업자로 산다는 건…
자전거 타면 쉽게 내려올 수 없듯
방심할 수 있는 날이 하루도 없어
코로나로 끝없는 터널 들어간 기분
한국적인 맛 세계에 알리고 싶어 


선망받는 직업을 버리고 가슴이 뛰는 일을 찾아 나서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욱이 마흔을 훌쩍 넘긴 가장이 자영업자로 진로를 바꾸는 건 용기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한 행동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마음 한 구석에는 꿈을 품고 있지만 섣불리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우동명가 기리야마 본진’ 신상목(51) 대표는 9년째 우동을 팔고 있다. 가족의 심한 반대와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17년 동안의 외교관 생활을 접고 우동집을 차렸다. 고된 일이지만 “우동이 참 맛있다”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손님들과 같이 고생하는 직원들을 보면 힘이 난다.

연세대를 졸업하고 외무고시에 합격한 신 대표는 잘나가는 외교관이었다. 일본 연수시절 알게 된 ‘기리야마’ 우동집에 반해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 파키스탄 주재 대사관 근무 시절 10분 차이로 폭탄테러를 면한 뒤 가슴 설레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마지막 눈을 감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난 7일 기리야마 본진에서 그를 만나 우동집 주인으로 살아가는 의미와 포부를 들었다.

-개업한 지 9년이 됐다. 외교관과 우동가게 주인은 어떻게 다르던가.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편하게 차를 타고 여행하다가 뚜벅이 내지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는 거나 똑같다. 차 타고 다니면 밖에 날씨가 추운지 더운지 알기는 하지만 실감하지는 못한다. 직접 밖에 나가서 걸어다니면 자기가 체감하고 실감하고 영향을 받는다. 그런 면에서 느낌의 차이는 있는 것 같다.”

-외교관이라는 선망받는 직업을 그만두고 우동가게 창업으로 진로를 바꾸게 된 계기는.

“공무원 생활이 안정되고 보람도 있지만 정부라는 가장 큰 조직의 일원으로 있는 것이잖나. 조직의 일원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다. 층층시하의 결제라인을 타고 운신의 폭이 제한되는 삶을 충분히 살아봤으니 자신이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지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동경이 있었다.”

-파키스탄에서의 경험이 결정적이었나.

“우동집을 하고 싶다는 마음만 있었다. 막연한 동경이었다. 파키스탄에 있을 때 수도 이슬라마바드 메리어트호텔에서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예약 시간 언저리에 호텔에서 폭탄테러가 났다. 내가 마침 꾸물대느라 약속시간보다 늦게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정문에서 폭탄이 터져 식당을 포함한 1층 전체가 크게 부서졌다. 수백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앞으로의 삶에 대해 망설이고 고민만 하기보다는 실제 행동으로 옮겨보자는 강한 용기 내지는 마음의 전환이 있었다. (그는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의전기획과장을 끝으로 외교부에 사표를 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가족의 반대가 심하지 않았나.

“아주 심했다. 가족을 설득하지는 않았다. 가족들의 동의를 구해서 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인 것 같지가 않았다. 가장도 사람인데 가족에 대한 기본적 책무만 할 수 있다면 자기가 추구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제적인 면에서 가족을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핑계 같은 걸 둘러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 거다.”

-‘기리야마 본진’ 우동 맛의 특징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서는 면의 식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매끄러우면서도 쫄깃한 식감, 이런 것들은 모순된 특성이라서 조화시키기가 쉽지 않다. 면이 너무 쫄깃하면 소화하기가 힘들고, 소화가 잘 되게 하려고 너무 익히면 탄력이나 탄성이 줄어든다. 이를 조화시키는 게 내 목표다. 그런 면에서는 소비자들에게 평가를 받았으니까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음식에는 비법이나 특별한 레시피가 있는 게 아니다. 음식을 잘 만들려면 기본을 지키는 수밖에 없다. 음식 맛에 기복이 있으면 안 된다. 내가 설정한 (맛의) 허용치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귀찮고 번거로운 일들을 계속 원칙대로 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물론 힘든 일이기는 하다.”

-기술을 전수받은 일본 우동가게의 영향인가.

“원점은 거기인 게 사실이다. (그는 일본 우동가게에 지인을 보내 우동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았다.) 음식은 지역마다 소비자들이 받아들이는 맛이나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현지 적응 노력을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우리 우동가게가 삼성전자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삼성전자는 반도체의 원천기술을 일본에서 받아왔지만 시장 수요 등에 따라서 계속 연구개발(R&D)을 하고 자기의 감성과 색깔을 입혔다. 우리 가게도 원점에서 기술을 받아왔지만 우리의 자체 노력으로 한국 시장에 맞게 적응한 것이다.”

-우동가게를 운영하는 철학을 듣고 싶다.

“음식은 그저 한 끼를 때우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삶의 활력을 주고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게 필요하다. 그런 느낌을 주는 가게가 되는 게 목표다. 먹는 장사 하는 입장에서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두 가지 경우에서 그렇다. 하나는 서빙을 하다 손님들이 자기들끼리 ‘이 집 우동 정말 맛있지’ 하는 소리를 우연히 들을 때다. 정말로 뿌듯한 순간이다. 다른 하나는 내가 고용을 창출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내가 일자리를 준 누군가에게는 이 가게가 삶의 터전이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만든 음식이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있다는 성취감과 만족을 느끼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 아닌가. 세상에 이것만큼 보람된 일은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자영업자로 사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을 텐데.

“2012년 9월 창업한 뒤 자영업자가 외부환경에 얼마나 취약한지 절감했다. 코로나19 사태는 물론 세월호 참사,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로 직격탄을 맞았다. 우리 가게는 일식집이어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로) ‘노재팬’ 운동 때문에 애로도 겪었다. 외생적인 요인으로 경영이 압박을 받으면 매우 힘들고 허탈하다. 자영업자는 따박따박 월급 나오는 기업이나 공공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과는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다르다. 방심할 수 있는 날이 하루도 없다. 가장 힘든 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크다는 점이다. 오늘 장사가 잘 됐다고 발 뻗고 잘 수가 없다. 내일도 잘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자영업은 자전거 타는 것과 비슷하다. 한 번 올라타면 쉽게 그만두지도 못한다.”

-아무래도 코로나19의 충격이 가장 컸을 것 같다.

“미증유의 사태다. 희망고문 같은 상황이 계속되는 게 제일 힘들다. 처음엔 매출이 반 토막 나니까 가게를 접어야 하나 하는 극한의 위기감이 있었다. 지난해 5, 6월 되니까 조금 풀리더라. 7, 8월에 2단계 대유행이 시작되면서 매출이 또 급전직하했다. 그러다 10, 11월 되니 조금 나아졌다. 이제 겨우 살았나 했더니 12월에 하루 확진자가 1000명 넘어갈 것이라고 하면서 거리두기 2.5단계가 됐다. 그때 타격이 가장이 컸다. 연말특수가 다 사라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들어간 것 같은 심정이었다. 이런 상황이 가장 힘들다.”

-정부의 자영업자 지원에 불만의 목소리가 크다.

“코로나19로 직접 피해를 본 당사자로서는 납득이 안 되는 정책을 취한 것도 있다. 자영업자 지원이 아니라 정확히는 소상공인 지원이다. 소상공인은 가족 위주로 영업하는 업장이 많다. 그래서 고용면에서 더 취약한 건 그보다 규모가 큰 업장이다. 소상공인 재난지원금의 경우 상시근로자 인원 수 제한으로 11명이 일하는 기리야마본진은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지난해 3월 ‘착한 임대인 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건물주에게 임대료를 깎아주면 정부가 절반을 보조해주겠다고 했다. 우리 가게 건물주도 임대료를 깎아줬다. 그런데 건물주가 감면해준 임대료를 정부로부터 보전받으려면 내가 소상공인이라는 확인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소상공인이 아니어서 건물주가 임대료를 보전받지 못했다. 그래서 감면받은 임대료를 다시 내고 있다. 건물주 잘못이 아니라 정부 정책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정부가 고용을 유지하고 업체의 피해를 줄이고 싶다면 돈을 줄 게 아니라 세금을 감면하거나 유예해주면 된다.”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고 자영업을 택한 것에 후회는 없나.

“없다. 일부러 그걸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럴 겨를도 없다. 나는 아직 과정에 있지 어떤 결과가 나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내가 10년 후 수백억원 자산가가 된다면 외교관을 그만두길 잘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니면 쫄딱 망한다면 그만둔 걸 후회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 수밖에 없는 시기이기 때문에 후회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게 맞는 말인 듯하다. 사업을 하면서 직장생활 때보다 삶도 고달프고 불안정한 것도 사실인데 뭔가 설레는 아침을 맞는 건 있다. 마지막 눈을 감을 때 (인생 잘못 살았다고)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꿈은 있다.”

-신 대표처럼 진로를 바꾸려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조직 속에서 안정감을 느낄 때 더 성과를 내고 보람도 느끼는 유형의 사람이 있다. 나 같은 경우는 거대한 조직 속에서 내 아이디어를 실현하려면 절충과 결제 과정을 거치야 하는 데 대해 회의감이 있었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자기가 스스로 결정하고 그에 대해 책임지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자영업자는 공무원과 달리 자기가 잘하고 못 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직업이다.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준비와 숙고를 한 다음에 자기의 적성에 따라 선택하는 게 바람직하다.”

-앞으로 각오나 포부가 있다면.

“기업은 성장밖에 없더라. 나도 창업을 해서 기업가가 됐으니까 성장하는 게 목표다. 일본 것을 들여와서 우동가게를 시작했지만 한국 외교관 출신인 만큼 한국 것을 갖고 전 세계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있다. 나는 한국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외화를 벌어오는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나도 그런 일을 하고 싶다. 창업할 때도 이것이 가장 큰 꿈이었다. 음식 장사를 하니까 한국 것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민간외교관으로서 외교부에 근무할 때보다 더 보람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원재연 선임기자 march27@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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